사랑의 황홀(恍惚) 또는 감미로운 몰아(沒我)
김노암(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그랬다면 당신보고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겠죠.”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여성의 예술이란 조어(造語)는 이상하다. 남성의 예술이란 말이 이상한 만큼. 20세기 이후 현대예술은 성(性)의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항상 연결되어 왔으며 또 매우 진지하게 다루어 왔다. 그렇지만 그것이 예술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기에 거기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의 예술작품, 예술가. 프리다 칼로나 까미유 클로델 또는 근래 각광 받고 있는 쿠사마 야요이나 트레이시 에민 또는 루이즈 부르조아 등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여성 예술가들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성과 젠더의 경계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었다. 밀레니엄 이후 한국의 현대미술의 많은 예술가들이 여성작가들이다. 그러나 몇몇 작가들의 전략적 혹은 선택적 주제로서 여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활동하거나 해석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가장 중요한 실재(reality)로서의 예술에서의 여성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 것이 현실이다.
성과 관련되어 당연히 포괄적으로 연결되는 주제로서 ‘사랑’이라는 관념은 더더욱 다루지 않는다. 남녀 간의 사랑, 나르시수스의 자기애, 인륜성에 따른 이타적 사랑, 종교의 신의 사랑, 데이빗 린치 영화의 기괴한 사랑이나 홍상수 영화의 찌질하면서도 끈적거리는 사랑 등. 사랑은 보편적인 주제이며 영원한 주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왠지 현대예술 또는 현대성과는 별 상관없는 문제나 과거 고리타분한 그리하여 고도자본주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매우 비현실적이거나 유치한 주제로 이해되기도 했다. 대부분 백과사전이나 도형사전, 상징사전과 같은 조형적, 형태적 문제와 관념의 연결 관계를 밝히는 선에서 머물고 만다. 상당수의 추상적, 비구상적 회화이미지는 논외가 되어 버리거나 아니며 뜬구름 잡는 식의 사변으로 치부되어 왔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여자가 남성에 의해 존재를 박탈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회철학은 남성중심사회에서 배제되거나 박제화 된 여성의 부제를 증거 해왔다. 많은 여성 예술가들은 이러한 인식과 통찰을 공유함으로써 과거 예술사에 실종되었던 여성의 자리를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다. 그것은 여성의 말과 이미지와 문화의 복귀이다. 우리 시대의 여성 예술가들은 이러한 거대한 사회 변화와 인식의 혁신 속에 확고한 존재 증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성이자 화가의 산물은 좀 더 이런 배경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물론 예술가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 3의 성이거나 문화적 생물학적 성(性)을 망각한 인간이라는 종과 관련된 유일무이한 동성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회화이미지는 작가의 의지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너무도 뻔한, 마치 이솝우화식의 너무도 선명한 알레고리처럼 보편적이며 일상적인 방향이나 주제와 연결되거나 아니면 정 반대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광기어린 어떤 감정과 통찰을 호출한다.
이 무작위적의 운동은 공존하는 결핍과 욕망을 계기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무작위성이며 이는 취미의 대한 유서 깊은 관념과 관련된다. 또한 취미는 생각과 그 생각의 대상을 표현하는 능력 사이에 무규정적으로 아무런 규칙 없이 자유롭게 나타나는 쾌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정희의 이미지는 그런 상황을 매우 친숙한 이미지로 ‘사랑’의 문제를 재현하고 있다. 그것도 현실이 된 사랑의 위기 가운데에서.
2
지난 시기 회화의 전통 속에 이미지를 다루었던 과거의 화가들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회화와 이미지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멀티미디어와 인터랙티브 기술이 매순간 혁신되는 시대에 전통적인 회화이미지의 존재론적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또는 있기나 한 것일까. 현대의 화가들의 중심과제가 되어 버렸다. 이제 성과 젠더 또는 예술의 진정성과 사랑이라는 주제 등도 마치 정보나 정보디자인의 한 요소처럼 다뤄진다. 이런 시대의 예술가든 마치 흑사병이나 콜레라 같은 죽음의 병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어떤 다른 세상이나 어떤 다른 자유나 상상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화가들에게 주어진 창작의 과제이자 경계들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취미와 관련된 회화이미지의 본래적 맥락은 20세기 이후 원본 없는 복제로만 사물과 이미지가 존재하는 멀티미디어 환경 속에서 그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현대의 삶과 경험은 오늘날 화가들은 마치 그림이미지와 조형요소들은 정보나 기계언어처럼 인식하였고 더욱이 장소특정성과 인스톨레이션 등과 같은 물리적 공간과의 연계 속에 과거 예술의 미덕이었던 마음속에 벌어졌던 심미적 운동이나 감정 등 보다 섬세하고 한편으로는 매우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경험들은 약화되었거나 표면적으로는 잘 다루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우울과 죽음과 고독과 고립 등과 쌍을 이루어 등장한 실존이나 정체성이나 여성성의 문제 등과 연결되어온 현대회화의 풍경 속에서 개개인이 홀로 몰입해 온 사랑의 환희나 황홀은 몇몇 미술계의 대가들의 일부 또는 그들의 일분 작품 이외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반면 노정희 작가의 이미지는 즉각적인 감정과 매우 느리게 자각하는 감정, 일상을 초월한 듯 무관심한 감정 또는 무료한 감정 등 다양한 심리상태를 연상시키는 행위들로 집적되어 있다. 마치 마젤란 성운이나 물병자리니 물고기자리니 하는 별자리와 같은 은하계의 별무리를 떠올리는 이미지로 보이기도 하고 또는 인간의 손이 닿은 적 없는 원시림을 최초로 찍어낸 초점을 맞추지 못한 흐릿한 이미지 등으로 보인다. 그리고 뭔가 분명 실체가 있음에도 뚜렷하지 않은 것들이 쏟아지고 흘러내리고 뿌려지고 날리고 있다.
그 가운데 작가의 이미지는 매우 선명해서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환희와 황홀한 감정의 몰입의 상태는 너무 자연스럽게 ‘사랑’과 연동한다. 사랑의 대상은 모호하다. 그 모호성으로 인해 매순간 그 대상은 욕망의 주체로부터 결핍을 환기시킨다. 구체적인 형상과 추상적인 형상 사이를 왕복 운동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대상의 모호성에 있으며 이는 단지 인식의 문제이기에 앞서 존재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구현하는 실재(Reality)는 모호함과 비구체성이 주는 어떤 막연한 상태이며 이런 상황이 극단에 이르면 대상을 상상할 수 없는 단계인 숭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모든 회화이미지가 일정정도 대상을 그려낼 수 없는 숭고의 씨앗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현현하는 것은 드물다.
회화이미지는 이미 실패가 거의 확정된 과정을 불가피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가능한 사랑의 노정을 작가의 이미지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어렴풋이. 마치 안개처럼 희미하고 비지시적(非指示的)인 상태의 반복된 경험은 화가들이 이미지를 사로잡는 과정에 처하는 보편적인 조건이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인지적이며 구체적인 지적능력보다는 자유분방한 정신의 섬세한 운동인 상상과 구성능력이 솟아오른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주제는 예술가들이 반복해서 되돌아가는 창작의 근원이자 종착지가 된다.
노정희 작가의 작업은 구체적인 대상과 분명한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대상과 그 구체성은 사라지고 하나의 감정의 묘사에서 벗어나, 모호하지만 무한히 확산하는 어떤 운동의 상태에 몰입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대상과의 관계가 처음에는 혼란스런 상태를 유지하다 갑자기 구체적으로 변하고는 이내 훅 사라져버린다. 대상의 사라짐, 실재의 실종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 이미지의 변화와 확산으로 재현된다. 시각이 넓게 그리고 빠르게 확산하는 우주적 스펙터클에 몰입하는 가운데 그녀의 이미지는 황홀과 우울 사이를 반복한다. 그 사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랑’의 사건과 기억을 떠올린다. 미처 재현된 적이 없었던, 또는 과거에 한번 잠시 등장한 후에 망각된 것들을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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